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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book50주년 '미니'의 자유와 해방정신
1964년 젊은 밴드 비틀즈가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를 얻는 사이 런던 패션에서는 ‘미니’라고 불리는 혁명적인 패션이 등장해 젊은 세대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물한다. 그리고 50년이 흘렀다. 미니스커트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2014.05.01# 20세기 초반인 1930년대 코코 샤넬은 19세기 여성 억압의 잔재인 뷔스티에로부터 여성을 해방시켰다. 1950년대 크리스천 디올은 전쟁에 상처받은 여성들의 영혼을 볼륨감 있는 뉴룩으로 위로한다. 1960년대 마리 콴트는 기성세대에 반대하며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 여성들의 혁명적 욕망에 부응하는 미니스커트를 선보여 패션의 길이 혁명을 주도했다.
올해로 미니스커트가 탄생한지 50주년이 된다. 사실 50년대 말부터 짧은 스커트가 나왔기 때문에 미니의 기원은 좀 더 과거로 갈 수 있지만 50주년이라는 의미는 미니를 단지 디자인적 창조가 아닌 대중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즉 젊은 여성들이 마리 콴트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당당하게 런던 거리를 활보한 것이 1964년이었다.
1964년 젊은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처음 런던 글래스고 거리에 등장했을 때 기성세대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당시 다리를 드러낸 미니의 등장은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혼란을 야기했다. 심지어 부도덕한 패션으로 치부되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요즘의 시선으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도 70년대 유신 시대를 살면서 경찰들이 자를 들고 다니면서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들을 쫓아다니며 단속을 했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 패션은 늘 유행보다 정조 관념이 우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 동안 미니스커트는 여성에게 자유와 해방을 느끼게 해주는 여성복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 말라고 억압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젊은 세대들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 듯 하다.
1968년 마리 콴트에 의해 짧은 헴 라인이 첫 선을 보인지 4년 후 글래스고 산부인과 의사인 이안 맥길리브레이 박사는 미니스커트를 "영국의 부도덕과 인구 폭발'을 야기할 것이라며 비난을 했다. 당시 기사를 덧붙이면 "이안 맥길리브레이 박사는 미니 스커트는 결혼전에 임신을 하는 젊은 신부를 양산하는 데 책임을 있다고 말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스커트의 대중화를 통해 대유행을 시킨 영국 디자이너 마리 콴트는 그녀에게 미니스커트 유행에 대한 낙관론을 펼치면서 "나는 미니스커트를 디자인할 때 자신감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내 스커트가 짧은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나는 일을 하기 위해 달려가서 버스틑 잡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다."고도 말했다. 즉 미니스커트의 탄생은 패션 미학과 좀 거리가 있는 셈이다. 60년대 런던에서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현실적으로 긴 치마가 비실용적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미니스커트 유행에 한 몫 했음을 알 수 있다.
# 미끈한 다리를 드러내는 대담한 미니스커트는 60년대 여성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짜릿한 패션이었다. 이전까지는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이 다리를 노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니스커트가 대중에서 선보인지 1년 후인 1965년에는 미니스커트 길이가 허벅지 중간까지 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길이는 경쟁을 하는 점점 더 짧아졌다. “조금 더 짧게”라는 요구는 여성들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욕망의 캐치프레이즈였다.
패션사적으로 보면 앙드레 꾸레주와 존 베이츠 같은 디자이너들이 1960년대 초반에 짧은 스커트를 선보였지만 1964년부터 미니스커트를 대중화시킨 마리 콴트가 미니스커트의 진정한 창시자로 기억되고 있다. 모즈족의 깔끔하고 기하학적인 재단, 이탈리안 드레스 등에서 영감을 얻은 마리 콴트는 미니드레스를 디자인하여 킹스 로드에 있는 자신의 부티크 ‘바자’에서 팔기 시작했다. 소매가 없는 피나포어 드레스와 밝은 색의 짧은 스커트는 1960년대 패션 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아이템이 되었고 젊은 여성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흥분시켰던 볼륨있는 뉴룩에서 벗어나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마리 콴트의 유례없이 짧은 디자인은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와 감탄을 자아냈다. 1971년 <베니티페어> 기사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우리 모두는 마리 콴트가 고리타분한 패션계에 얼마나 극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저속한 외설로 생각하고 분노했다. 코코 샤넬은 미니스커트가 역겹다고 비난했고 세실 비튼은 패션 역사상 이렇게 적은 재료로 가려야할 부분을 이렇게 많이 드러낸 적은 없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 사실 미니스커트가 태어난 데는 60년대 문화 역시 일조했다. 당시 영국은 음악적 혁명을 통해 젊음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 팝 뮤직의 비트와 관련된 10대 문화는 새로운 문화의 축으로 급진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카나비 스트리트나 킹스로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감지한 <타임>지는 1966년 4월 12페이지의 커버스토리로 ‘런던: 역동적인 도시(London: The Swinging City)라는 헤드라인을 실었다. 그리고 이후 영국의 젊은 문화는 ’스윙잉 런던‘으로 불리게 되었다.
청년들 사이에서 장발이 급속도로 번져나갔고 소녀들은 비달 사순 식으로 손질한 쇼트 컷 헤어에 미니스커트로 스타일을 완성했다. 미니로 시작된 길이 혁명은 최소 표현이라는 미니멀리즘에 불을 붙였다.
미니스커트는 런던의 신예 디자이너 마리 콴트의 개성과 아이디어가 집약된 것이었다. 콴트는 1958년 아동복 사이즈에 가까운 시프트 드레스를 발표했지만 대중들이 관심이 가지고 적극적으로 착용한 것은 1964년부터였는데 미니의 유행에는 잡지도 일조했다. 미니스커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바로 전 해인 1993년 <보그>가 미니스커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잡지에 기사가 나온 지 수개월 후 미니 스타일은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 1964년에는 시회 문제로 대두될 정도로 젊은 세대들의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이는 청년 패션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 1955년, 런던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아이디어가 넘쳐나긴 했지만 이러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가 판매로 이어지기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바로 이때 마리 콴트는 런던 최초의 부티크인 바자(Bazaar)를 첼시의 킹스로드에 오픈했다.
런던 외곽의 블랙리스에서 태어난 마리 콴트는 골드시미스 칼리지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애초부터 디자이너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남편 알렉산더 플런캣 그린과 친구인 아치 맥네어와 함께 패션 소매업에 처음 뛰어 들면서 패션과 인연을 맺었다.
패션 부티크 바자의 모험을 성공적이었으며 처음부터 이익을 창출했다. 마리 콴트의 원래 생각은 킹스로드를 찾는 젊고 칭의적인 사람들과 사교계 사람들은 대상으로 옷을 사고파는 개념이었다. 라지만 언론에 첼시 세트(Chelsea Set)로 알려지면서 첼시는 새로운 삶과 옷차림의 동의어가 되었다. 더불어 마리 콴트의 인지도도 올라갔다.
하지만 매장을 운영하면서 마리 콴트는 적절한 디자인을 구하느라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융통성이 결여된 제조업자들 때문에 어려움도 겪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옷을 팔기로 결정했다. 상점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서 대부분의 영감을 얻어 자신만의 디자인을 만들었고 아울러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들로부터 디자인을 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는“우월 의식은 패션에서 사라졌다. 우리 가게에서는 공작부인이 타이피스트와 같은 옷을 사려고 서로 밀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직접 디자인을 해보니 의류 제작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을 절감했다. 그래서 야간 수업 몇 개를 수강한 후 판매용 종이 패턴을 변형하고 헤롯 백화점에서 소매가로 구입한 옷감을 사용해 자신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창조했다. 좋아하는 자동차의 이름을 따서 만든 짧은 시프트 드레스에 미니(Mini)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드레스가 바로 50년된 미니스커트의 원조가 된 셈이다.
그녀는 패션에서 젊음, 재미 그리고 보헤미안을 찬양했다. 그녀가 운영하는 부티크 바자는 여전히 대다수 젊은이들의 수입을 넘어서는 사치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마리 콴트가 여성들이 아닌 젊은 걸들에게 디자인 포커스를 맞춘 것은 영 캐주얼 시장을 미리 내다본 혜안에서 비롯되었다.
부티크를 오픈한지 7년이 되지 않아 마리 콴트의 사업은 백만 파운드(약 17억 원)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는데 1960년대 초반에는 믿기 어려운 매출 성적이었다. 1963년에 나이츠브리지에 두 번째 매장을 열었으며 자신의 디자인을 대중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 더 낮은 가격대의 레이블인 진저 그룹(Ginger Group)을 론칭했다. 그녀는 독특한 데이지 로고는 화장품, 타이츠, 신발과 속옷을 포함한 많은 신제품에 등장했다. 비틀즈가 등장한 1964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녀는 미니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미국 대형 소매업체 J.C 페니와 10년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미국의 패션 작가 어니스틴 카터는 <선데이타임즈> 칼럼에 마리 콴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운이 좋은 소수의 사람만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적절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최근의 패션계에는 세 사람이 있다. 샤넬, 디올, 그리고 마리 콴트다.”라고.
# 50년대 말부터 짧은 헴 라인을 연구한 마리 콴트는 1964년 미니스커트를 창조하면서 대유행을 불을 붙였고 60년대 패션을 대표하는 아이템을 하나로 만들었다. "미니를 발명한 것은 제가 아니라 킹스 로드의 소녀들이었다. 나는 여성들이 춤을 추고 달릴 수 있는 옷을 만들었다. 결국 고객이 원하는 길이를 제공한 것뿐이다. 나는 미니스커트를 아주 짧게 입었는데 소비자들은 나에게 더 짧게 더 짧게'를 외칠 정도였다"라는 마리 콴트의 말처럼 결국 마리 콴트가 미니스커트의 처음 선보였지만 대중화시킨 것은 변화와 자유를 원하는 젊은 여성들이었던 셈이다. 뭐 요즘도 그 공식은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미니스커트는 셀러브리티들에게 더 인기였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가수 루루는 짧은 헴라인의 스커트와 니 하이 부츠로 명성을 얻은 대표적인 미니 마니아였다.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 역시 미니 팬으로 60년대 그녀가 입었던 파코 라반이 디자인한 미니스커트는 글래스고 리버사이드 뮤지엄에서 전시중이다.
올해 80세가 된 마리 콴트는 아직도 다리가 돋보이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성들을 보면 설렌다고 한다. 그럼 그녀가 생각하는 50년 동안 미니스커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최근 인터뷰에서 마리 콴트는 모델이자 배우인 진 슈림톤과 60년대 오드리 햅번을 들었다. 둘 다 60년대를 풍미한 셀러브리티들이다. 그럼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 나이 제한이 있다면 몇 살까지일까? 이에 대해 마리 콴트는 "당신의 다리에 달려있다"고 심플하게 말했다.
# 경제에 대한 속설 가운데 경기가 나쁠수록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고 한다. 아마도 경제가 어려우니 원단이 조금 들어가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한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이는 패션을 모르는 단지 경제학자들의 주장일 뿐이다. 그럼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유럽에서 원단이 많이 들어가는 풍성한 뉴룩의 등장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난 50년 동안 미니스커트는 꾸준히 여성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여성들에게 미니스커트는 단지 유행의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슴을 조이는 뷔스티에 때문에 고생하는 여성들에게 블랙 미니 드레스를 선물한 코코 샤넬이나 여성미를 과시할 수 있는 미끈한 다리를 드러내 스스로 여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미니스커트를 선물한 마리 콴트나 지향하는 패션 철학은 동일했을 것이다. 바로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패션의 혁명적 정신이다. 뷔스티에나 긴 치마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강요한 패션이라면 블랙 미니 드레스와 미니스커트는 여성들에 의한, 여성들을 위한, 여성들의 패션이었다.
# 미니스커트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패션은 늘 사회 변화와 문화적 격동기와 함께 한다는 점이다. 옷이 단지 의식주 수단이 아닌 패션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패션은 제2의 피부라는 말이 있다. 제2의 피부라는 의미는 본질인 알몸이 아닌 겉으로 드러난 또 다른 알몸이라는 뜻이다. 제2의 피부인 옷차림을 통해 그 사람의 개성과 취향 심지어 직업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소통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패션의 중요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미니스커트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패션계는 다시금 미니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도 있다. 상류 문화가 밑으로 전파되는 하향식 패션에서 젊은 세대의 패션이 위로 전파되는 상향식 패션의 전형을 보여주는 미니스커트는 패션을 전공하지 않은 젊은 영국 디자이너들의 진보적이고 실용적인 사고에서 탄생되었다. 팝음악 혁명인 비틀즈가 처음 선보인 이듬해 마음대로 뛰며 춤출 수 있는 옷, 출근길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갈 수 있는 옷,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느끼며 스스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옷, 고정관념을 뛰어 넘어 길이 혁명의 발상 전환으로 탄생한 옷이 바로 미니스커트다. 50세가 된 미니는 오늘날 클래식에 가깝다. 플레어스커트건, 주름 장식이 있건, 신축성이 있거나 볼륨이 있건 간에 짧은 치마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짧은 치마를 입기 위해 기성세대와 치열한 투쟁을 했던 지금은 할머니가 된 60년대 패션 걸들의 노고를 기억했으면 한다. 포에버 미니!
글 유재부 패션평론가
[참고서적: <패션을 뒤바꾼 아이디어 100>, <패션, 문화를 말하다> <패션의 역사>]